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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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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1891(高宗 28)

음력 112일 전남 진도군 진도면 쌍정리에서 양천 허씨(陽川 許氏) 허경언(許京彦, 1870~1944)6남매 중 장남으로출생하였으며, 조선말엽의 서화가인 소치 허련(所熾 許鍊, 1808~1893)이 종고조부.

 

1898(7)

진도에 유배중이던 당대 대학자 무정 정만조(戊亭 鄭萬朝, 1858~1936)에게서 한문을 배우고 소치 허련의 아들인 미산허형(米山 許瀅, 1862~1938)에게서 기본적인 화법(畵法)을 익힘.

 

1908(17)

17세부터 19세까지 공립진도보통학교(4년제)에서 수업.

 

1909(18)

정만조가 의재(毅齋)라는 호()를 주고 때를 같이 하여 백년토록 오래 살라는 백년(百年)백련(百鍊)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

 

1910(19)

공립진도보통학교 졸업 반 년을 앞두고 자퇴. 스승 정만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감. 기호학교에 입학하지만, 학교보다 서화미술회 출입을 자주 함. 같은 해 11, 고향으로 돌아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출입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

 

1912(21)

외가의 척숙이 되는 이병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감. 가을, 교토(京都)의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법학과에 입학.

 

1913(22)

리츠메이칸대학을 그만두고 도쿄로 감. 메이지(明治)대학 법과에 청강생으로 공부하던 중 당시 일본화단의 활발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고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함.

 

1914~1915(23~24)

메이지대학을 그만둔 후, 도쿄의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며 중국의 명화를 감상함. 남화산수(南畵山水)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1874~1945)의 문하생(門下生)이 됨. 도쿄에 계속 머무르면서 본격적인 화가수업을 받고, 일본 곳곳을 다니며 전시회를 개최함.

 

1918(27)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 진도에서 작품 활동.

 

1920(29)

진도에서 광주로 옮김. 목포 공회당에서 작품 30점으로 첫 귀국전 개최.

 

1921(30)

4월 서화협전을 구경하고, 광주에 돌아와 30여 점을 준비하여 광주 상공회관에서 전시회 개최.

 

1922(31)

<하경산수(夏景山水)>, <추경산수(秋景山水)> 2점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鮮展)으로 약칭)에 출품. <추경산수>가 동양화부(東洋畵部)에서 1등 없는 2등상으로 입상.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1891~1955),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1890~1945) 등이 중심이 되어 의재허백련화회(毅齋許百練畵會)를 발기하고, 서울 보성고보(普成高普)에서 전시회 개최.

 

1923(32)

2회 선전 동양화부에 금강산 여행 때 사생했던 것을 토대로 <추산모애(秋山暮靄)>(3등상 수상), <춘산명려(春山明麗)> 출품.

 

1924(33)

성연옥(成年玉)과 결혼. 3회 선전에 <계산청취(谿山淸趣)>출품하여 입선하고, 중앙국민학교에서 전시회 개최.

 

1925(34)

4회 선전에 <호산청하(湖山淸夏)> 출품. 진주, 함양, 대구 전주에서 전시회 개최

 

1926(35)

5회 선전에 <청산백수(靑山白水)>, <계산춘효(谿山春曉)> 출품. 부산에서 전시회 개최.

 

1927(36)

6회 선전에 <모추(暮秋)>출품. 사군자인 <매월도(梅月圖)>특선. 이후 선전에 출품하지 않음.

 

1929(38)

1927년 이후 선전에 출품하지 않았으나, 제자들의 작품은 출품시킴. 독자적인 작품 제작과 문하생 지도에만 전념

 

1930(39)

평양, 신의주, 함흥 등지에서 전시회 개최. 이 시기에 거의 전국적으로 유람.

 

1932(41)

7월 서울 삼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2인 작품전 가짐.

 

1936(45)

2월 서울에서 김은호, 박광진(朴廣鎭), 김복진(金復鎭)과 함께 조선미술원(朝鮮美術院) 창설.

 

1938(47)

광주에 정착 후 <연진회(鍊眞會)> 발족.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이 찬조회원이 되고, 동강 정운면(東岡 鄭雲葂), 근원 구철우(槿園 具哲祐), 목재 허행면(木齋 許行冕) 등의 서화가들과 이원보, 민병기, 오경유 등의 관리들, 독립 투사 양백아, 광주의 거부 최정숙 등이 정회원이 됨.

 

1939(48)

연진회관 건립을 위해 <연진회원전> 개최. 김은호와 변관식이 찬조 출품.

 

1940(49)

2회 연진회원전 개최. 회원들의 작품 외에 변관식, 이상범, 고희동의 작품도 함께 전시. 이때부터 의재산인(毅齋散人)이라는 낙관 사용. 5월 조선미술관에서 개최한 <십명가산수화전(十名家山水畵展)> 참가.

 

1942(51)

3, 서울 정자옥(丁字屋)(현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10, 정자옥화랑(丁字屋畵廊)에서 개최된 제1회 조선남화연맹전(朝鮮南畵聯盟展)에 회원으로서 출품.

 

1945(54)

일본의 패망과 조국 광복. 진도에서 광주로 올라옴. 오방 최흥종(五方 崔興琮, 1879~1966)과 함께 삼애학원(三愛學院) 설립하기로 뜻을 모음. 최흥종으로부터 오방정(五放亭)(춘설헌의 전신)인계 받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무등산 다원(茶園)을 인수받아 무등산 아래 산장을 짓고 다원과 축산농장을 자영하면서 화필생활을 계속함. 무등산 산장을 수류화개관(水流花開館), 근인당(近仁堂), 적취각(積翠閣), 춘설헌(春雪軒)이라 이름함. 11월에 조선미술협회가 창립될 때에도 역시 중심 회원으로 참가.

 

1946(55)

4월 광주 상공회의소에서 농업고등기술학교 설립 기금모금화전 개최.

 

1947(56)

농업기술학교-삼애학원 설립. 121명 입학. 허백련 스스로 한문과 국사를 가르침. 춘설헌에 제자들이 다시 모여 제자들을 가르치며 무등산에 은거하기 시작.

 

1951(60)

해남에서 회갑을 맞고, 의도인(毅道人)이라 호().

 

1953(62)

2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백설홍수(白雪紅樹)> 출품.

 

1954(63)

3회 국전에 동양화부 심사위원이 됨. <유곡(幽谷)> 출품.

 

1955(64)

4회 국전에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어표청효(漁浦晴曉)> 출품. 1회 전라남도문화상 수상.

 

1956(65)

5회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하심유거(夏心幽居)>, <추강범영(秋江帆影)> 출품. 부산에서 전시회 개최.

 

1957(66)

6회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어항풍정(漁港風情)> 출품.

 

1958(67)

7회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어형초제(漁兄樵弟)> 출품.

 

1959(68)

8회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해불양파(海不揚波)> 출품. 1953~55년 사이 광주 미국공보원장으로 있던 라벨이 춘설헌을 출입하면서 모은 허백련의 그림들을 뉴욕에 가져가 <의재소장전>을 개최함.

 

1960(69)

9회 국전 초대작가로 <사시팔경(四時八景)> 출품. 대한민국예술원(大韓民國藝術院) 2회 추천회원이 됨.

 

1961(70)

10회 국전 추천작가(초대작가제 폐지) 및 고문이 됨. <농촌신추(農村新秋)> 출품. 5월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개인전.

 

1962(71)

11회 국전 추천작가 및 고문. <추강(秋江)> 출품. 김은호, 이상범과 함께 대한민국 문화포장(文化褒章) 수상.

 

1964(73)

13회 국전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산자수명(山紫水明)> 출품. 이후 국전에 출품하지 않음

 

1966(75)

대한민국예술원상 미술부문 수상.

 

1969(78)

무등산 단군신전(檀君神殿) 건립추진위원회 결성. 서울 조흥은행 본점에서 건립기금 모금 전시회 개최.

 

1971(80)

12월 서울신문사 주최 <동양화 6대가전><춘강윤원(春江潤遠)>, <하산심원(夏山深遠)>, <추산고원(秋山高遠)>,

추산평원(秋山平遠)> 4점을 출품.

 

1973(82)

서울 신문회관에서 회고전 개최. 동아일보사 주최 <허백련 회고전> 개최.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1974(83)

831일 전남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 받음.

 

1977(86)

자택에서 심장병으로 별세. 광주공원에서 사회장(社會葬)으로 거행. 장지(葬地)는 춘설헌 뒷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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